로안 낙서 쇼타임!



"여어, 눈을 떴구만."
"...정신 차렸어? 몸은 좀 어때?"

누구야 이 자식은.

"아직 충격이 남아있나본데...날 알아보겠나?"

아니. 전혀 모르겠어. 여기가 누군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어.
게다가 아직 눈 앞이 흐려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고.

토할 것 같은 현기증과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필사적으로 눈의 촛점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맞췄다. 3 일 연속 술을 마신 것 처럼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손 발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다.
이건 좀 심각하다고.

"그래, 눈을 잘 뜨고 날 좀 봐봐. 생각보다 상처는 큰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아직 잘 대답을 못하는 걸 보니 언어 중추에 장애가 생긴건지도..
팔리아프로톡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지금 그런 걸 얘기해봤자
별 수 없겠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아까부터 시끄럽게 조잘대고 있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고 손 끝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만 나의 시야가
지면에서 부터 멀어져서 눈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맞춰졌다.

남자는 회색 머리에 검은색 머플러, 그리고 두터운 장갑복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무시무시한 - 실로 무시무시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날카로운
이빨이 잔뜩 달린 전동 체인건을 들고 있었다. 뭐냐 이 녀석은.

얼굴에는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 같은 - 자잘한, 그러나 주름살과 더불어
너무 자연스러워 보이는 - 상처가 수 없이 많이 있었다. 남자는 씨익 웃으며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는 내 손을 잡아 당겼다.

"이봐 친구.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그렇게 무턱대고 뛰어가니까 적의
트랩에 당하는 거잖아. 아무리 전공(戦功)을 세우고 싶다는 기분은 알겠지만
무리는 하지 말라고. 근데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내 이름? 내 이름이 뭐였지? 순간 머릿 속이 텅 빈 것 처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 3 일 밤낮을 고민하다가 고르고
고른 이름이었다는데 마치 백지를 보는 듯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아버지 이름 조차도 까먹었군. 이거 장난이 아닌데.

"뭐 충격으로 인한 가벼운 기억상실일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말라고.
순간적인 빛과 충격파가 자네의 온 신경을 뒤흔들어 놓은 거니까.
자자, 빨리 이거나 받으라고. 좀 있으면 또 엄청 몰려들걸세."

남자가 내민 것은 약 80 cm 정도 길이의 원통형 물체에 손잡이가 달려있는
녀석이었다. 아니 방아쇠도 달려있군. 유선형이며 크롬 메탈 재질로 웬만한
충격이나 화학적인 반응에도 강하다. 그런데 이 녀석을 뒤집자 거기엔 시커멓게
탄 자국과 재가 상당량 붙어있었다.

"자네도 운이 좋구만. 그 녀석이 가장 큰 파편을 막아줘서 산 거야. 심지어
심장 근처에서 말이지. 대부분 그 정도면 다 골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 거리에서 멀쩡한 건 자네 뿐이었거든. 크하하."

나는 망연자실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나는 어딘가의 군대나
조직에 속해있는 듯 했다. 그것도 지금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나는 서둘러 내 몸을 살폈다. 실제로 팔 다리와 등에 약간의 아픔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딘가 부러지거나 벤 상처는 없는 듯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육체는 내 눈 앞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육중한 검은 장갑복에 보호되고 있었다.
노출된 곳은 얼굴과 팔 다리를 움직이기 쉽게 하기 위한 군데군데의 관절 정도?

이렇게 두꺼운데도 무게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그런 것보다는 아직도
머리의 아픔이나 어지러움이 더 귀찮고 화가 났다.

"자, 여기서 어물어물하면 또 공격 받을테니- 움직일 수가 있으면 빨리 움직이자고.
숫자로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해. 어떻게든 녀석들의 숫자를 조금이라도
줄인다음에 지원군을 기다리는게 오래 사는 길이지. 알았다면 빨리 움직이게.
로안 일병!"

그는 내 가슴께의 플레이트를 주먹으로 툭 치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남자의 등을 눈으로 쫓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로안. 10 차 알레그 - 스파비트 대륙전쟁에 참전한 일개 병사였다.
이름을 불리자 마자 지금까지의 혼란된 기억이 순식간에 하나의 유리병 속에
들어가 합쳐진 듯이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난 이 무식한 전장에 떨어진 일개 병사였다.

거대한 자기 폭풍과 불꽃의 비가 이 대지에 뿌려지고 있었다. 사방에서는 간간히
알 수 없는 진동음과 폭발음이 들려온다. 천둥과 지진은 아니다. 그래 GRG* 와
ZEDM* 의 폭발음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오렌지 빛 대지에 수없이 많은 시체와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굴러
다니고 있다. 저 멀리에서 무미건조한 파열음과 불꽃이 산란하고 있었다.

남자는 벌써 50m 도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남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적군의 플레어 봄 공격을 받고 정신 못
차리는 신참이 이런 황야에서 혼자 있다가는 적군의 밥이 되던가 혹은 낙오해서
결국 버려지기 십상이다. 이런 곳에서 내가 죽었다고 해서 아무도 날 위해서
울어주지는 않으니깐.

전방 왼쪽에 뭔가 그림자 같은 것이 언뜻 비침과 동시에 남자의 어설트 라이플이
불을 뿜었다.

"타라라라라랏!"

순식간에 수십 발의 총을 맞은 적은, 아군은 절대 아니었겠지 - 허무하게 뒤로
쓰러졌으나 바로 그 뒤에서 새로운 그림자들이 일제히 불꽃을 뿜기 시작했다.

"엄호해!"

남자는 재빨리 길가의 움푹 패인 곳으로 몸을 날렸다. 나는 달리면서 신중히
총을 조준하며 재빨리 2-3 발의 총탄을 날렸다.

"쾅! 쾅! 쾅!"

적이 쓰러진 기미는 없었지만, 예상 외의 방향에서 날라온 총탄에 그림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쪽도 아마 엄폐물 뒤로 모습을 감춘거겠지.

"몇 놈인지 봤나?"

"못 봤습니다"

"이제야 말문이 트였군. 지금 너하고 나 밖에 없다는게 불운이었어. 솔직히
자네까지 없었으면 나 혼자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절대 무리지. 아마 열 손가락
꼽을 만큼은 죽고도 남을 걸? 하지만 2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대규모
부대라도 오지 않는 한은 무장에서 만큼은 우리 쪽이 우위란 말이야. 허접한
쓰레기 슬라이서 몇 마리로 우릴 잡을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일 걸."

남자는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 처럼 중얼중얼거렸다. 결코 죽지 않겠다는
마음을 저렇게 표현하는 걸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남자는 고개를 내밀고
라이플의 트리거를 당겨 무차별 사격을 했다.

"로안! 저쪽 바위로 우회해서 더 가까이 접근해. 자네의 무기는 접근하지 않으면
거의 피해를 줄 수가 없어. 더 많은 병력이 오기 전에 먼저 놈들을 해치우고 반대편으로
이동한다. 라인 셀 가까이까지만 가면 우릴 주워줄 택시* 한 대 정도는
찾을 수 있을거라고."

"알겠습니다."

나는 대답을 마친 뒤 기력을 짜내어 오른쪽으로 달렸다. 아직도 손과 발이 후들거렸지만
지금 생명이 걸린 판에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아드레날린의 분비 탓인지 두통도
아까보다는 좀 덜해진 것 같았다.

(쏘지마라. 쏘지 마.)

달리는 발 밑에서 황야의 돌무더기가 여느때 보다 큰 소리를 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적들이
지금이라도 이 쪽을 향해 총탄을 마구 날릴 것 같다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러나 여기서
놈들을 해치우지 않으면 더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게다가 이 쪽은 숫자도
둘 뿐이다. 이렇게 된 바에야 속전속결. 전력이 부족한 것은 스피드로 커버하는 거다.

첫 엄폐물인 바위 뒤에 몸을 맡기자, 뒤 쪽에서 또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그 남자가 대치하고 있는 것이리라. 기회는 이 때다. 먹이를 잡고 있는 순간의 맹수는
경계심을 늦춘다고 했던가.

하나. 둘. 셋. 하며 전속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렸다. 순간적으로 왼쪽에서 보이는
인영이 셋. 아직이다. 여기서 발사해봤자 내 위치만 노출된다.

20m, 15m, 10,9,8,7,6...

내 발소리에 놀란 듯 한 놈이 이 쪽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내 손에 들린 크롬 메탈
DEB 303 샷 건이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불을 뿜으면서 녀석은 온 몸에서 피를 흘리며
3m 정도를 "날았다"

그제서야 눈치를 챈 두 번째, 세 번째 녀석이 총구를 이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제대로 조준도 안 하고 쏜 총탄은 허무하게 내 왼쪽, 오른쪽으로 흘렀으며, 난
정확한 조준으로 두 번째 녀석의 몸통에 수 많은 바람구멍을 내놓았다.

그러나 세 번째 녀석까지는 무리였다. 내가 아무리 엄청난 속사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쪽으로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놈 보다 빨리 탄창을 갈아끼운 뒤
쏘는 건 불가능했다. 남은 건 샷 건으로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거나, 혹은 몸통 박치기로
녀석의 품에 뛰어드는 것 뿐이다. 나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녀석이 피할 것 같은 방향으로
뛰어들면서 놈을 제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귓가에 몇 발의 총탄이 스치면서 녀석은 반대편으로
몸을 돌린게 아닌가.

내 자세는 완전히 무너졌고, 놈은 내 등 뒤에 서 있다. 이제 녀석이 방아쇠를 당기기만 해도
이 로안의 일생은 한 방에 끝나게 되는 것이다. 뭐 아쉬울 건 없다. 죽기 전에 2 마리는 잡았
으니까, 2 킬 1 데스면 그래도 더블 스코어 잖나.

"타타타타타타타탓!"

공기가 찢어질 듯한 발사음을 들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건 죽음은 생각보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구나. 하는 것이었다. 뭐 순식간에 인체 기능이 파괴되고 뇌가 일정 이상의 고통은 자동으로
차단할테니 사람은 "맞는 순간" 에는 그다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문제는 그러고서 안 죽게
되면 좀 비참한 꼴이 되어 버리지만.

그러나 수 초가 지났는데도 내 의식은 멀쩡했고, 내가 지면으로 다가가지도 않았고, 지면이
나에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귓가에는 찢어질 듯한 총소리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귀를 징징
울리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어떤 아픔도 세계의 이상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봐 친구. 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건가?"

고개를 돌리자 싱글싱글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얼굴에 난 수많은 상처가 아까보다
더 친근해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남자는 한 손에 총을 늘어뜨린 채로 지금 막 자신이 쓰러뜨린
적을 발 끝으로 툭툭 차고 있었다.

"간발의 차. 라는 건 이런 걸 두고 얘기하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슈테인 상사님. 내 눈 앞에 있는 이 남자야 말로 역전의 용사.
중대 지휘관이자 겁쟁이였던 카르트문 소위를 THM* 밖으로 발로 차서 밀어내고
부하들을 위해서 언제나 자신이 맨 앞에 섰던 남자의 이름을 나는 기억해냈다.

"어서 가자고. 빨리 들어가서 시원한 맥주 한 잔 하고 싶군."

"알겠습니다! 슈테인 상사님."

"부하들 다 잃고 달랑 두 명이서 귀환했다고 하면 아마도 카르트문 자식한테 제대로 까일 것 같긴
하지만 말야... 그래도 지금은 맥주 맛이 더 그립네. 무사히 돌아가면 내가 한 잔 쏘지."

"아닙니다. 지금 목숨 하나 빚진 대가로 제가 내겠습니다."

"크하하. 자네 목숨 값은 맥주 한 잔보다는 더 할 것 같은데? 사병 월급 얼마나 한다고.
아까 플레어 맞고 살려 준 거 까지 합치면 두 잔 아니라 석 잔도 쏴야지. 그런 소리 말고
나중에 내 부탁이나 하나 들어주면 돼."

"알겠습니다. 상사님!"

슈테인 상사는 껄껄거리면서 어깨에 총을 둘러매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약 1 시간여의 이동 끝에, 우리는 부상자를 회수해서 돌아가려는 THM 을 만날 수 있었고,
우리는 무사히 귀환했다. 슈테인 상사는 등 뒤에서 발광하는 카르트문 소위에게
아랑곳없이 양 손에 든 맥주잔을 꿀꺽꿀꺽 해치워버렸다.

나는 결국 그 날 슈테인 상사의 부탁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의 부탁을 듣게 된 것은
이 날로 부터 약 130 여 일 후, 란스레이 회랑의 전투가 끝나고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였다.



to be continue....?




GRG* : (Gigantic Raid Gear) 거대 공격 전차.
ZEDM* : (Zone Explosive Damage Missile) 광범위 폭발형 미사일.
택시* : THM 을 칭한다.
THM* : (Tactical Hovering Machine) 전략 부유 비행기. 대부분 전장에서의 운송 및 부상자들의 후송을 담당.



덧글

  • 디굴디굴 2017/04/26 16:51 # 답글

    뭐야 이거 내가 쓴 거 맞아....?
  • 디굴디굴 2017/04/26 16:51 # 답글

    6 년 전의 나는 이런 걸 쓸 수 있는 사람이었구만... 요즘 집 안에서 게임만 하니 뇌가 썩어버린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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